local clinic 소개

“구멍”

구멍은 나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다가온다. 어릴 적부터 구멍을 좋아했다. 50여년 전 아스팔트가 깔리기 전, 서울 주택가 동네 골목의 양지 바른 곳마다 삼각형이라고 하는 구슬치기(일본말로 다마) 놀이가 있었다. 삼각형을 그린 후 그 안에 구슬을 놓고, 멀리서 구슬을 던져 맞춰서 삼각형 바깥으로 튀겨 나온 것을 따먹는 경기였다. 이 삼각형이라고 하는 놀이는 그 시절 워낙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것으로 아이들에게 오락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다. 동네마다 유명한 선수들은 멀리 다른 동네로 원정 경기를 가서 빅 매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나는 평생을 내기해서 돈을 따본 적도 없고 구슬치기 같은 것에 손재주가 없어, 남들 하는 놀이에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평범한 동네아이였다. 이 삼각형 놀이가 열리는 곳 한켠에 하수구 수챗구멍이 있었는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하수구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 구슬이 엄청나게 많았다. 요즘도 가끔 골프장을 보면 골프장의 연못 밑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골프공이 들어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나마 갖고 있던 구슬마저 다 잃고 옆에서 구경만 하다가 수챗구멍 속에 있는 구슬을 꺼낼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방법이 필자의 방법인지 누군가의 방법을 보고 모방했는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다.) 비닐우산에 있는 대나무 작대기를 4갈래로 갈라서 구슬 위를 찍어 누르면 구슬이 대나무 속으로 박혀들어 오면 꺼낸다. 이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면 안 되므로 밤이 되길 기다린 후 동생을 데리고 나와서 손전등으로 비추게 하고 그 많은 구슬을 꺼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성공이다”라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옆 동네, 그 옆 동네 (그 당시 삼선동, 돈암동 일대를 말함)의 하수구를 차례로 순례하면서 수많은 구슬을 꺼내는데 성공했다. 그 당시에 밤늦게 돌아다닌다고 야단도 맞았지만 그 때 나는 너무 너무 행복해서 사업 번창하는 재미에 매일 속으로 웃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서는 오염된 구슬을 세숫대야에 넣고 비누로 정성껏 깨끗이 씻고 건너 방 아랫목에서 수건으로 닦고 말렸다. 그렇게 모은 구슬이 고추장 항아리 단지 속에 가득 찰 정도였고 나는 학교 갈 때와 집으로 돌아올 때 마다 항아리를 향해서 절을 했다. 이 항아리가 나의 어린 시절 신앙이기도 했다. (그 당시 이상한 항아리라는 제목의 만화가 큰 이기를 얻었는데 항아리에 소원을 빌면 뭐든지 다 들어준다는 내용의 만화였다.)

   그 후로 초등학교 중고등 학교, 대학교 시절을 보내고 나서 의사가 되었고 현실 감각이 부족해서 그 중에서도 외과의사가 되었다. 허겁지겁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어느 날, 내 앞에 남은 것은 외과 전문의 자격증과 외과용 칼 한 자루였다. 전문의가 되었기 때문에 칼을 뽑긴 뽑아야 했지만 아직은 칼을 쓰기가 두렵고 자신이 없는 겁쟁이 칼잡이였다. 그러던 중 외과 선배의 소개로 치질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처음 시작한 일이 구멍 속을 닦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관장을 하고 손가락을 구멍 속에 넣고 진찰하고 구멍 속에서 자르고 지지고 꿰매는 일이었다.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고 까맣게 잊혀져 왔던 어린 시절에 가슴 뛰게 했던 바로 그것, 바로 그 구멍을 다시 찾게 된 것이었다. 구멍에 코를 박고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재미가 쏠쏠하게 있었다. 대학병원에서 신장이식 수술이나 암수술 하는 것 보다 내가 직접 해 봐서 그런지 훨씬 재미도 있었다. 이때 처음 일본에 가서 조금씩 항문수술을 배워가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30대와 40대를 보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대장항문학회가 내 인생의 큰 낙(樂)이자 삶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1992년부터 시작한 구멍 수술은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얼굴이 사람마다 다 각기 다르듯이 항문 모양과 치질의 생김새는 너무 다양해서 아무리 해도 싫증나지 않고 재미있었다. 구멍 수술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외과의사로서 체력이 다소 떨어지는 나에게 적합했고, 손가락이 가늘고 섬세한 것도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이때 같이 시작했던 것이 대장내시경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장내시경 검사가 널리 보편화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검사 도중에 루프가 생기면 1시간 이상 걸리기로 하였다. 기다란 작대기를 구멍 속에 밀어 넣고 맹장 끝까지 도달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기술이 가능한 기술이 되고 지금은 보편적이 기술이 되어 10분 정도에 끝내는 검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새로운 밀레니엄인 2000년을 맞이하기 직전, 개업을 못해보고 일생이 끝나면 평생 한(恨)이 될 것 같아서 지하철 2호선 구로공단역(현재 구로디지털단지역)앞에 항외과라는 이름으로 개업을 했다. 처음 항외과라는 이름으로 개업할 당시에 환자들이 “항원장님”, “항원장님”, 하면서 항씨라는 성(姓)도 있느냐고 많이 물었다. 이 때 하마터면 성이 바뀌는 불효를 저지를 뻔 했다. 그러던 항외과가 지금은 전국에 100개 이상이 된다.

   개업을 시작하자마자 의약분업 파동으로 자주 과천청사, 여의도 광장, 보라매공원 등에 의약분업 반대투쟁집회에 다니느라고 바깥바람을 많이 쐬고 다녔다. 그래도 처음 개업했던 터라 그 와중에도 외과의사의 사명감으로 입원 환자가 있을 때는 병원에서 먹고 자고 지냈다. 처음부터 항문 환자만 보겠다는 고집 때문에 하루에 환자가 5명오는 날도 있었다. 그 때는 얼마나 환자가 고마웠던지 수술하고 나서 환자 옮기는 것도 내가 직접 하고 나를 찾아준 환자가 고마워서 환자를 업고 다니고 싶었다.

처음 개업했을 때 꼬마 환자가 진찰실 창문 밖을 보면서 “야, 기차다!” 하고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나도 레일위로 달리는 전철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어서 이 자리가 참 좋았다. 그 때 진료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자주 듣던 팝송 음악이 영화 쉬리의 주제가였던 Carol Kidd가 부른 When I dream이었다. 이렇게 매일 구멍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파다보니 또 20년이라는 시간이 꿈 같이 흘러갔다. 그러나 나의 일상은 20년 전과 하나도 변하게 없다. 항문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긴 작대기를 구멍 속에 넣어 휘저어서 장 끝까지 넣고 눈이 시리도록 모니터를 보고 또 본다. 이때 큰 용종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흰 이빨을 드러내면서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그래도 가장 행복한 때는 손가락을 구멍 속에 넣고 치질이 있던 자리가 꼬들꼬들하게 만져져서 치료가 잘 됐다는 것을 느꼈을 때다. 감사할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 매일 구멍 속을 파고 있는 이 일을 변함없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나는 항상 감사드린다. 오늘도 진료실 창문 밖 파란하늘 아래로 2호선 전철이 달리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