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의 취미생활 탐구

나와 만년필 (가천대 길병원 외상외과 최강국)

만년필.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특히 나이에 따라서 그럴 것인데, 나는 학생 때 어른들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서 쓰시는 만년필을 보면서 엄청난 호기심을 느꼈던 것 같다. 샤프나, 볼펜을 주로 쓰던 나에게는 잉크를 넣어서 쓰는 만년필이 왠지 멋있고 고상하게 느껴졌다. 만년필의 펜대는(“배럴”이라고 한다.) 다른 펜들과는 다르게 보통 윤이 돌았고 미끈하게 빠진 것이 단단해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년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캡을 뺄 때 나타나는 그 영롱한 금빛 펜촉(“닙”)일 것이다. 잘 차려 입은 신사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고 캡을 여는 광경은 아….. 마치 무사가 검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칼집에서 검을 빼내는 것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그거 진짜 금이에요?” “진짜 금이지” 아… 그 귀한 금으로 펜을 만들다니!! “저도 써볼 수 있을까요?”라고 하면 의례히 돌아오는 대답은 “만년필은 함부로 쓰는 거 아니야.” “나중에 대학생이 되면 사주마.” 라는 말이었다. 이 때문에 만년필에 대한 동경은 커져만 갔고 그러다가 아버지를 졸라서 어렵게 얻은 만년필이 파카 만년필이었다 (금도금 촉이었고 금촉은 아니었지만^^). 파카 만년필을 고무로 된 잉크색을 눌러서 만년필을 충전 하는 방식이었는데 잉크를 충전하고 쓰는 과정이 너무 좋았다. 괜히 쓸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 저것 낙서를 끄적대며 만년필을 가지고 놀았는데, 역시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것이 없었는지 금방 고장을 내고 말았다. 커서 알게 된 것이지만 만년필은 정말이지 애물 단지이다. 관리와 사용에 있어서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필기를 할 때 꾹꾹 눌러 써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


필압을 높여서 필기를 하면 닙의 슬릿(펜촉의 가운데 갈라진 틈)이 벌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잉크가 닙의 끝(“팁”)까지 내려오지 않게 된다. 고장이 나는 것이다. 일반 기계와는 달리 만년필의 닙의 수리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이리저리 구부리고 하다 보면 구제불능 상태로 더 망가뜨리게 된다. 나의 만년필에 얽힌 추억의 제 1막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년필을 까맣게 잊고 고등학교, 대학교를 정신 없이 보내고 수련의 때야 만년필 따위를 생각 할 수는 더더욱 없고… 수련을 마치고 나는 대망의 공보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보의 생활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군생활 어렵게 하신 분, 하시는 분, 그리고 하실 분에게는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 지금 이렇게 멍때리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지만 얼마 안지나 널널한


생활에 익숙해 지게 되었고 예전 생각을 하나 둘씩 하다가 만년필 생각이 나게 되었다. 다시 시작한 만년필 생활의 처음은 바로 펠리칸 m205 데몬이었다. 데몬이라고 하는 것은 데몬스트레이션의 준말로 한마디로 투명해서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모델이란 뜻이다. 그때 20만원 가량에 구입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땐 이거 이렇게 큰돈으로 펜을 사다니, 하고 적잖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ㅋㅋㅋㅋ……..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만원 대 만년필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르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암튼 펠리칸 m205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만년필이다. 비록 금촉은 아니었지만, 피스톤 필링 방식의 넉넉한 잉크 충전량, 부드럽고 가벼운 필기감, 거기다 투명해서 잉크가 다 보이는 장점. 피스톤 필링 방식을 선택한 것도 어릴 때 이모부가 유럽 출장을 다녀오셔서 사오신 몽블랑 만년필에 잉크 충전 하는 모습의 보고 너무 멋있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억 때문이었다. 가격을 듣고 한번 더 정신이 아득해지긴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력도 되겠다. 한번 발을 들인 나는 어릴 적의 로망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때부터 만년필 콜렉터의 길도 들어선지 십 년이 넘었다. 지금은 처음처럼 마구잡이로 지르지는 않고 일년에 한두 차례 정도만 구입을 하고 있고, 특히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몽블랑 작가 시리즈(매년 유명 작가의 이름을 따서 디자인을 바꿔서 나오는 한정판) 위주로 수집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실제로 만년필에 막 입문하시려는 분에게 약간의 가이드가 될 만한 얘기를 잠깐 해보려 한다. 먼저 만년필을 제대로 취미로 하시려면 만년필 동호회, 온라인 카페 같은데 가입을 하시고 거기 올라온 글들만 일독을 하시면 어느 정도 감을 잡으실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이 귀찮고 그냥 적당한 펜을 구입해서 사용해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을 위한 글이다.


닙의 굵기: 초심자라면 닙(정확히 말하면 닙의 끝, 즉 “팁”이 될 것이다.)의 굵기를 신경 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굵을수록 좋다. 팁은 대개 이리듐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클수록 당연히 펜의 수명도 길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 취향이므로 각자 써보고 본인에게 맞는 굵기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팁의 굵기는 회사마다 다 다르므로 예민하신 분은 반드시 써보고 구입하도록 하자. 재미있는 것은 나이가 젊으면 얇은 EF촉을, 나이가 들수록 굵은 M촉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서명용으로 사용한다면 더더욱 굵은 촉을 추천한다.

어떤 펜을 구입할 것인가: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몽펠파워(몽블랑, 펠리칸, 파커, 워터맨) 중에서 선택하면 후회는 하지 않는 다는 말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단연 몽블랑이다. 만년필에서 몽블랑이 차지 하는 위치는 그만큼 크다. 브랜드 가치, 인지도, 디자인, 성능 어느 것 하나 일등이 아닌 것이 없다. 특히 셔츠나, 자켓, 그리고 가운 앞주머니에 꼽았을 때 드러나는 흰 별의 존재감을 넘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난 몽블랑, 그 중에서도 146을 추천한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6은 만년필의 정석, 기본 중에 기본. 그러면서도 존재감, 실용성 모하나 빠지지 않는 모델이다. 149는 커도 너무 커서 실사용에는 불편하다. 146이 평범하다면 그 사이즈로 나온 모델을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최근에 나온 모델 중 JFK가 개인적으로는 좋아보인다. 좀 더 특별한 모델을 원하면 146 사이즈의 작가시리즈 중 취향에 맞는 것으로 추천한다(작가 시리즈는 몇 개의 모델만 빼고는 전부 146 베이스로 되어있다.). 어느 정도 옛날 것은 구하기 어렵고 중고 여부도 판별해야 하며, 가격도 비싸거나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으니 초심자라면 비교적 최근 모델을 추천한다. 비교적 최근 모델 중에 마크 트웨인, 생텍쥐페리, 다니엘 디포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작가 시리즈는 디자인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니 직접 보고 결정하도록 하자.

그 다음으로 추천하는 것이 펠리칸 m800이다. 균형이 잘 잡혀있고 실사용에는 오히려 146보다 나은 면이 있다. 이 사이즈에 다양한 서브 모델이 있으니 잘 알아보고 선택하면 된다. 또한 투명한 데몬스트레이션 펜을 원한다면 펠리칸이 제일 좋은 선택이다. 파커는 닙의 품질의 일관성이 앞의 두 모델보다 떨어진다. 더군다나 카트리지나 컨버터 방식이어서 만년필의 가치가 앞의 두 모델보다 떨어진다. 따라서 권장하지 않는다.

워터맨은 만년필을 최초로 만들었다고 맨날 자랑하는 브랜드인데.. 그런 것은 지금 알 바 아니고, 세레니떼나 에드슨 등 걸출하고 독특한 모델 들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얼마 안에 단종시켜 버리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현행 모델을 사용해본 적은 없으나,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다.
그 밖에 브랜드 중에서 선택을 원한다면 부드러운 필기감을 원한다면 오마스 중에서, 사각거리는 필기감, 그리고 세필을 원한다면 오로라 모델 중에서 고려해 볼 수 있다. 오마스는 부드러운 필기감과 유려한 디자인이 강점이나, 만듦새나 내구도 측면에서 약하며 판매처가 별로 없다. 오로라는 디자인이 화려하고, 만듦새는 좋으나, 펜이 좀 작은 편이고 내구도도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만년필사는 파이로트, 세일러, 플레티넘 등이 있는데 보통 기본은 하는 편이다. 특히 세필 EF촉에서 강점을 보인다. 그리고 에보나이트 같은 특이 소재로 만든 펜이나, 우루시 모델은 사실 일본 펜 말고는 대안이 별로 없다.
까르띠에나 듀퐁의 펜들도 좋다. 특히 허영심을 충족하기에 좋다. 그래도 인지도 측면에서 몽블랑에는 안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운 주머니에 꼽았을 때 일반적인 사람들은 몽블랑은 알아보지만 다른 펜들은 뭔지도 모른다.

펜의 선택은 정말이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만년필은 기호품의 성격이 강하므로 실용성 하나만 보고 선택을 하게 되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된다. 비용을 조금 더 써서라도 마음에 드는 펜을 선택하는 것이 후회를 덜하는 지름길이다. 흔히 가성비라는 얘기가 있다. 만년필을 고고를 때는 가성비가 아니고 비싸도 감성비를 따지는 것이 좋다. 비용을 아끼려면 만년필을 쓰질 말아야지… 실용성만 따지면 700원짜리 제트스트림 볼펜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신품이나 중고냐: 초심자라면 신품을 추천한다. 중고가 많이 싸긴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하자가 있는 제품, 특히 닙에 문제가 있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고 이 경우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금촉이냐 쇠촉이냐: 당연히 금촉이다. 18K 금이 닙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재료로 알려져 있다.
잉크 충전 방식: 일반적으로 피스톤 필러 방식이 컨버터 방식보다 더 가치 있고 충전량도 많다. 그러나 제대로 만드는 곳은 내가 알기로는 몽블랑과 펠리칸 이 두 곳이다.
잉크 선택은: 잉크는 파커의 퀸크 블루 잉크가 제일 안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잉크들도 일반적인 만년필 회사의 잉크라면 크게 문제는 없다. 하지만 잉크를 섞어 쓰거나 하는 것은 섞어도 되는 특별한 제품 말고는 해서는 안된다.
각인 해도 되나요: 민주주의 국가이니 뭘해도 되지만, 만년필 애호가 들에게 금기 시 되는 행위이다. 애호가 중 누군가 하신 말씀이 있다 “저는 몸에 문신하지 않고 만년필에 각인하지 않습니다.”



사실 컴퓨터의 발전으로 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나도 지금 이 글을 워드 프로세서로 쓰고 있다. 정말이지 삭막한 사회이다. 이럴수록 만년필 잉크 냄새가 그리워 지는 것은 왜일까? 지금은 편리하지만 일도 많이 하고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고 반면에 정과 멋은 점점 줄어드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 같다.